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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한 의병 활동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한 의병 활동가
이름 업적
안천민 자는 각보, 임진왜란 때 최문병과 더불어 영천성 탈환에 공을 세움
김응룡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반곡 ( 盤谷 ) 출신인 김응광 (金應光)님은 상산김씨( 商山金氏)로 아버지 김봉린( 金鳳麟 )과 어머니 완산이씨( 完山李氏 ) 사이에서 서기1555년 5월 9일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 )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우은 (愚隱) 이다. 부인은 곡강최씨(曲江崔氏)이다.임진왜란 이후에 김응룡( 金應龍 )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7일 최문병(崔文炳)이 자인(慈仁) 울곡리(蔚谷里)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때에 반곡과 가까운 울곡리로 달려갔다.
최문병의 창의록(倡義錄)에 의하면 의병장 유학 최문병(崔文炳) 자 일장(日章),우대장(右隊長) 김홍(金泓) 자 여윤(汝允), 좌대장(左隊長) 유인춘(柳仁春) 자 열지(悅之), 의사 박춘(朴春) 자 화백(和伯), 김응광(金應光) 자 명중(明仲)외 13명이었다.여기서 김응룡께서 의병으로 들어가 최의병장을 따라 5월11일에 오목천(烏鶩川)에서 적을 치고, 20일은 두곡(杜谷)에서, 6월 27일에는 영천성(永川城)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우고, 8월에는 자인(慈仁) 경내(境內)의 적을 쫓아냈고, 1593년8월에 경주군 아화(阿火)의 적을 쫓고, 12월에는 경주 서악강(西岳岡)의 적을 격퇴하고, 1594년5월에는 경상남도 언양(彦陽)과 울산(蔚山)의 적을 치고, 1596년 4월에 창녕의 의병대장 곽재우를 찾아갔다. 1598년 정유재란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화왕산성으로 곽재우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 防禦使)를 찾아갔다.
이때 곽재우는 많은 군사를 모아 7월21일에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결사적인 방어를 하였는데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대군을 이끌고 성밖에 이르렀으나 하루 밤낮 동안 성중을 살폈으나 함부로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그대로 돌아서 강을 건너 우도(右道)로 향하였다. 이때에 곽재우는 군사를 성 밖으로 보내어 후미를 쳐서 많은 적의 수급(首級)을 베었는데, 김응룡님도 이때에 전공을 세워 사복(司僕:종6품)의 벼슬을 받았다.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에는 이때에 참전한 용사의 이름이 실려있다.
1605년 4월16일에 제작된<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삼등(三等)으로 실려있다. 1642년3월3일에 별세하니 88세였다.

릉(陵)은 경상도 경산군 고산면 이천동(일명 배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아들 김이벽(金以璧)과 맏아들 김이진(金以振)은 전라도, 충청도에서 임진왜란을 진압, 충청도 아산군 현충사내에 릉(陵)이 있다.

최문병 최문병 의병장 안장, 보물 제747호, 경산군 자인면 원당리 243

최문병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역 장사들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하던 말의 안장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안장에 새겨진 무늬가 아름다우며 아주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더욱 더 소중한 것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때 용감하게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싸운 의병장이 사용한 말 안장이라는데 있다.

우리도 이와같은 호국정신을 본받아 조국을 지켜야 할 것이다.

박응성 호는 매헌, 무광에 급제, 오위도총부도사(종5품)을 지냄
박응량

매헌 박응성의 종매, 성주사원 전투에서 공을 세움

박응량은 광해군 1년(1609)의 울산부 호적대장에는 온양리(지금의 오양, 오산, 서생, 청량의 4개 읍면에 걸쳐 있었다)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명종 3년(1548)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태사(太師) 언부(彦孚)의 후이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의 6세손, 대산헌(大司憲) 해(咳)의 5세손, 과천현감(果川縣監) 사조(嗣祖)의 증손, 주부(主簿) 돈손(敦孫)의 손자이다.
그는 임진왜란의 개전 때는 45세었으며 광해군 1년(1609)에는 62세로 생존하고 있었다.
선조실록의 사료에는 박응량의 활약상을 말하여 임진년 이후부터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의 모던 전투에는 박응량의 활약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도산성 전투에서 6만의 병사를 이끌로 선봉으로 나섰다고 전해진다.

박응량이 가졌던 관직으로는, 주부(主簿), 회원통정(會員通政),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이 세가지로 전해진다.
주부는 종6품이고, 통정이라 함은 문관의 정3품 단상관의 품계이며, 첨정은 종4품에 해당하는 직인 것이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종형 박 응성(朴應成)과 더불어 전공을 세원 선무원종공 (宣武原從功) 3등에 녹훈되었다.

변함, 변호, 변문

삼의사(三義士), 고산서당을 창건

변함(變咸)과 변호(變護)는 일찍이 서로 이어 김제(金堤) 훈도(訓導)로 재임한 바 있는데 퇴직 후 고향에서 후진들에게 강학(講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또 변함(變咸)과 변호(變頀) 형제는 고을 선비들과 힘을 모아 고산서당(孤山書堂)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진섬 자는 여명, 호는 성재, 남천면에서 왜적에 저항하였고, 욱수동 망월산성에서 항거
최응담 경산 의병대장, 청도 접경지 성현.남천 금곡동에서 항전
하양현
창의(倡義)8의사
신해, 황경림, 김거, 허대윤, 허경윤, 박능정, 박붕, 허응길
이 간 자는 공직, 호는 괴암, 괴암일고 지음
박응득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
서사선 자는 정보, 호는 동고, 인조반정후의 공신 포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의병을 일으켜 진압
김시성 자는 문원, 호는 금포,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간 봉림대군 호위, 삼도통제사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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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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