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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AN 문화의 고장 자랑스러운 용성 용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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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및 유래

경산 시역 1시 2읍 6면의 하나이며 옛 자인군의 지역으로서 1914 년 행정 구역에 따라 자인현 상동면과 하동면, 그리고 청도군 일위면 석현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 곳에 있는 용성의 이름을 따서 용성면이라 하고 경산시에 편입되었다. 관할하고 있는 구역은 당리·덕천·송림·부제·곡신·곡란·용산·대종·가척·용천·용전·부일·매남·내촌·외촌·도덕·고죽·미산·고은·쟁광의 20개 리며, 동쪽은 청도군 운문면, 남쪽은 청도군 금천면, 서쪽은 남산면과 자인면 북쪽은 진량면과 영천군 대창면에 닿는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의 석학 이인로(李仁老) 선생이 반룡사(盤龍寺)에서 읊은 반룡사시에 이 곳을 동도라고 칭한 것을 보면 경주의 직할지가 아니었던가 한다.

또한 이곳은 선사 시대의 유물로 현존하는 것만도 150여 개의 지석묘가 있다.

1960년대의 개간 사업과 70년대의 농경지 정리 당시 사라진 많은 지석묘를 합한다면 아마 300여 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 또 출토된 많은 석기와 토기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부터 높은 지석묘 문화와 부족 문화를 형성하여 내려온 고장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면사무소를 처음에 덕천리에 있었으나 1950년 공비들의 방화로 면사무소가 불에 타고 다음 해 당리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성의 동쪽은 청도운문면이요, 남쪽은 같은 청도의 금천 땅이다. 다시 서쪽은 남산면과 자인면, 북쪽은 진량과 영천의 대창면을 이웃하여 있다.

용성은 본디 자인군의 한 지역으로서 자인의 동쪽이면서 위가 되므로 하여 상동면(上東面)이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다시 조정하면서 하동면의 곡신(谷新), 망덕(望德), 도전(道田), 용천(龍川), 도산(道山), 부일(扶日), 용산(龍山), 산대(山垈), 수동(水洞), 두곡(頭谷), 남성(南城), 북성(北城), 대종(大宗), 가척(加尺), 용전(龍田), 송림(松林), 부제(釜堤), 오산(午山)과 청도면 일위면 석현동의 일부를 합하면서 용성을 마을의 이름으로 삼기에 이른다.

미루어 보건대 용성이란 고장의 이름은 십중팔구 용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용성면의 주산(主山)이 바로 용산이며 용산을 달리 용산성 혹은 용성이라고 부르기에 그러하다. 용산은 남산면의 갈지리와 용성면의 곡신과 용산리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400여 미터지만 이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날이 오래도록 가물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 곳 용산에 기우제를 올린다. 매년 때가 이르면 용산지(龍山池) 부근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이웃하여 있는 용강사의 스님을 모셔다가 당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 드린다. 이르자면 마을의 제사를 지낸다. 용산지라 하는 곳은 용산 동북쪽에 있는 연못을 이른다.

한편 마을 뒤쪽에 있는 용거랑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로 후려친 곳인데 일백여 미터나 파여 있다. 용거랑을 용구렁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구렁이나 거랑이나 갈라져 후미지게 파여 있는 곳을 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성에는 용과 걸림을 보이는 마을 이름이 여럿 있다. 용산은 물론이고 용전(龍田), 용천(龍川)이 이들 보기에 값하는 곳이다. 용전 동쪽에 자리한 반룡사(盤龍寺)도 같은 경우라고 할 것이다. 고려 충렬왕 29년(1303)에 절을 지었는데 조선조 인조 무렵 계운과 명언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온다. 한 때 저 유명한 원응국사(圓鷹國師) 같은 고승대덕이 거처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용과 관련한 고장이 많이 있는 것일까. "훈몽자회"의 자료를 볼라치면 용을 미르 혹은 밀이라고 적고 있다. '밀' 혹은 '미르'라 함은 물을 이르고 있다. 일본말로 물을 미쓰라 한다. 이는 밀-믿-밑의 단어족(單語族)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니 용은 물신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용이 물신이라면 가물 때에 용에게 기우제를 지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풍수논리로 보면 산은 용으로 비유하는 일이 많다. 물신을 화나게 해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신을 화나게 해서는 삶의 길이 편하지 못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조상들은 용을 두려워하였다. 용은 물신이며 동시에 불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니까 용이 물신과 불신의 대명사처럼 쓰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유교의 수호신인 동시에 불교의 수호신이기도 한 것은 그만큼 물을 중시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과 불은 우리 생명의 말미암음이니 물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 물과 불,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흐르는 물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우리 몸의 일부로 여기면 좋을 것이다. 생명이란 물과 불의 함수이니까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용성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갈래로 갈라지는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넓은 평야와 언덕으로 되어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삶터로서 적절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단적인 보기가 용성면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지석묘(支石墓)를 들 수 있다.

지석묘군은 금호강 지류인 오목천변의 넓은 들판에 한 줄 혹은 세로 모여 있으며, 하천류와 거의 병행하여 나타나며 내륙 지방의 지석묘 분포의 한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주로 오목천 상류 어름에 군집하여 있다 살피자면 쟁광리와 고은리, 은곡리로 이어지는 평야 지대에 18기 무덤, 미산이나 당리 부근에 18기의 무덤, 곡신리와 곡란리의 31기의 무덤, 고죽리에 28기, 용전리와 용천리에 4기 등 모두가 151기의 지석묘가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고죽리의 28기의 무덤은 약 150여 평에 전과 후, 양측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줄로 모여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 곳 지석묘의 형식은 거대한 바위로 된 암괴의 덮개돌만 땅위로 나타나 있으며, 지석은 매몰되어 알 수 없는 형식과 지석이 덮개돌 아래 나타나 있는 형식 등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저자 대구대학교 정호완교수

  • 담당부서 : 용성면
  • 최종수정일 :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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